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쇠렌 키르케고르 (문단 편집) === 『죽음에 이르는 병』 === 아마도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작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작품은 말년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죽음에 이르는 병』일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건 간에, 확실한 것은 키르케고르의 후기 사상, 즉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빼놓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절망의 세 가지 형태를 서술한다.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을 때 그가 설정하고 있는 계기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가 헤겔 철학과 맺고 있는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가 전반적으로 헤겔의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의 현실 존재를 설명할 때는 서로 상반되는 두 계기의 변증법적인 종합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인간은 종합으로 존재하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영혼/영원/무한/가능성'이라는 초월적 계기와 '육체/시간/유한/필연성'이라는 물리적 계기의 종합으로 존재한다. 이때 가능성은 바로 자유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인간은 필연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가능성을 꿈꾼다. 하지만 또한 현실적으로 인간은 물리적 법칙들에 속박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그의 물리적 존재는 필연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유는 가능성과 필연성의 변증법적 종합 속에 있다.[* 초월적 계기로 가능성을, 물리적 계기로 필연성을 두는 것은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스피노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스피노자의 세계관에는 달리 될 가능성이란 것이 없으며,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또한 없다. 오직 필연적인 법칙에 의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키르케고르가 고려했던 것은 이러한 세계관에 대한 대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이율배반, 즉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필연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존재의 이율배반은 칸트 철학에서 먼저 나타난다. 자유 의지와 인과 필연성의 이율배반은 칸트의 제3 이율배반으로, 칸트는 인간이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인과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이율배반을 해결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키르케고르 역시 칸트의 입장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헤겔 철학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칸트가 내세운 예지계-현상계에서의 이중적인 자유 개념은 헤겔 철학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변주되는데, 헤겔은 다만 그 용어를 배후와 현상으로 바꿔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제시되고 있는 심미적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직접적 심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적 심미주의'이다. 이때 전자는 동물적인 향락과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삶으로, 그러한 삶은 전적으로 필연에 의해 속박되어 있으며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상실한다. 반대로 반성적 심미주의는 인간이 예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세계를 무시하고, 오직 음모를 꾸미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은 두 심미적 계기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들을 종합해 내야만 한다. 심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윤리적 실존은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물리적 한계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사실성'으로서의 절망에 대한 자각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자기는 '결단'을 내리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윤리적 인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오만함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자와의 관계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신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신인 동형 동성론의 오류에 빠져 있다. 이때 '윤리적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당대 사상사적인 맥락하에서 본다면 '인륜적 실존'으로, 즉 헤겔주의적인 용어로 옮겨도 큰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관념론을 수용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그와 갈라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신과 같아질 수 있다고 하는 오만에 관해서이다.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의 대안으로 종교적 실존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기준에서 본다면 단순한 영아 살해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전적으로 고귀하다. 그것은 신 앞에서 윤리를 포기하는 압도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원저의 구조상으로는 종교적 실존이 윤리적 실존에 앞서 설명되고 있다.]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은 각각 절망 앞에서의 반항과 연약함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윤리적 실존이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절대자에 대한 반항을 품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절망을 수용하고 절대자 앞에서의 한없는 연약함에 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들, 즉 반항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는 신 앞에서 떨게 된다는 점에서 반항은 연약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실존은 처음에는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지각하지만, 절망을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직접적 심미주의의 단계에서 인간은 그의 물리적 세계에 완전히 뿌리내린 채, 희미하게 절망의 단초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한 개인에게 주어진 행운이 파괴될 때(인간의 행운이란 아주 약한 것이기에 그 파괴는 쉽게 일어난다) 마침내 자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좀 더 진보된 인식, 즉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성적 심미주의는 절망을 회피하며, 그것과 맞서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절망에 맞서는 결단을 내리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절망의 원인을 찾기에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결단을 내리는 단계의 절망,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궁극적으로 지상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절망은 본래적으로 영원한 것에 관한 절망이며, 자기는 영원함에 관한 절망 앞에서 최초로 자신의 영원성을 자각하고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만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르케고르 철학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절망이 더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며 끔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은 절망하지 않으며, 자연인은 절망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교도만이 절대자의 앞에서 절망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떨며 종교적 결단을 향해 열려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교도만이 영원과 가능성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할 수 있다. 이항 대립의 철폐라는 구호가 오히려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키르케고르의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인간 중심주의-그리스도교 중심주의의 맥락에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지해 둬야만 할 것은, 그러한 평가에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면모가 있으며,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기획은 단순한 인간 중심주의 이상의 철학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필연성의 지배에 대하여 개인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의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